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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퀼스 (Quills, 2000)
    퀼스 (Quills, 2000)

     

    들어가는 말

    《퀼스》(Quills, 2000)는 말의 자유가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킨다는 믿음을 고통스럽게 증명하는 영화다. 필립 카우프만은 18세기 지식인 마르키 드 사드를 통해, 권력이 인간의 목소리를 얼마나 잔혹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를 묘사한다. 그는 펜 하나로 세상을 도발했고, 세상은 그 펜을 뺏기 위해 감옥과 신앙, 도덕이라는 이름의 굴레를 만들어냈다. 샤라턴 정신병원은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권력이 불편한 언어를 가둬두는 실험장이었다.

    사드는 더 이상 종이도 잉크도 가지지 못했지만, 그는 벽에, 옷감에, 심지어 자신의 피로까지 글을 남겼다. 그 광기의 기록은 사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마지막 자유였다. 로이 신부가 내세운 도덕은 믿음의 탈을 쓴 폭력이었고, 신앙의 언어는 검열의 도구로 전락했다. 카우프만은 신부의 손끝에서 드러나는 위선의 그림자를 냉정하게 포착한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통제하고, 사드의 욕망을 질서의 파괴로 단죄하지만, 그 속에는 권력의 욕망이 숨 쉬고 있었다.

    영화 속 성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위선을 드러내는 언어이며, 억압의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의 몸으로 외치는 자유의 문장이다. 마들렌의 순수함조차 그 체제의 잔혹함 앞에서 희생된다. 그 희생은 한 시대의 죄악을 증언한다. 사드의 입을 막은 것은 칼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언제나 권력의 가장 충실한 병사였다.

    카우프만은 이 작품을 통해 묻는다. 인간은 과연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 그는 말한다. 진실은 언제나 더럽혀질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란 결코 관용의 시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권리다. 사드는 죽음 이후에도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의 침묵조차 외침이 되었다.

    《퀼스》는 그 외침을 다시 불러낸다. 종교와 국가, 도덕과 제도가 한목소리로 자유를 짓누를 때, 인간의 언어는 더욱 빛난다. 그 빛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폭력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어떤 검열 속에 살고 있는가. 카우프만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사드의 미소를 남긴다. 그 미소는 조롱이 아니라 선언이다. 자유는 언제나, 그 어떤 감옥보다 강하다.

     

    줄거리

    샤라턴 정신병원은 빛이 닿지 않는 프랑스의 가장 어두운 구석이었다. 그곳에는 세상의 질서에 반항한 자들이 갇혀 있었다. 그중에는 마르키 드 사드라는 이름이 있었다. 그는 귀족이었고 작가였으며, 동시에 체제에 대한 불온한 목소리였다. 그는 펜으로 권력의 위선을 찢어버렸고, 욕망으로 신의 이름을 조롱했다. 세상은 그를 미치광이라 불렀지만, 그의 언어는 그들의 두려움을 비췄다.

    샤라턴의 원장은 인간의 영혼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억압을 정당화했다. 그는 사드를 ‘교화’하려 했고, 그의 손끝에서 자비는 곧 처벌이 되었다. 그러나 사드는 그 감시 속에서도 글을 멈추지 않았다. 종이는 금지되었고 잉크는 빼앗겼지만, 그는 벽과 천, 심지어 자신의 옷에까지 이야기를 새겼다. 그의 단어들은 죄가 아니라, 억압된 인간이 남긴 불타는 기도문이었다.

    젊은 수녀 마들렌은 그의 글을 몰래 필사해 바깥으로 전달했다. 그녀는 그 속에서 불경이 아니라 진실의 고통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사드는 죄인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감금된 인간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의 동정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마들렌의 행동은 곧 발각되고, 그녀는 신앙과 인간성 사이에서 찢겼다. 그 갈등은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라, 두려움을 심는 성채임을 보여준다.

    로이 신부는 샤라턴을 감독하는 권력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도덕의 이름으로 통제했고, 신의 뜻을 빌려 폭력을 가했다. 그의 설교는 구원의 언어로 포장된 심문이었다. 그는 사드의 글을 불태웠고, 그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사드는 웃었다. 그는 말이 막혀도 생각은 불타오른다고 말했다. 그 웃음은 패배가 아니라 저항의 서곡이었다.

    사드의 글은 여전히 세상으로 흘러나갔다. 그의 음담패설은 실은 권력의 부패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병원 밖의 독자들은 그 글을 읽으며 분노했고, 교회와 정부는 더 강력한 검열을 시행했다. 그들은 도덕을 내세웠지만, 그 속에는 질서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사드는 결국 펜과 종이, 옷과 목소리까지 모두 빼앗긴다. 그러나 그는 침묵 속에서도 쓴다. 피로, 손톱으로, 기억으로 문장을 이어간다. 그는 인간의 존엄이 말의 자유 속에 있음을 믿었다. 그의 광기 어린 눈빛은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세상을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정한 죄인인가.

    마들렌은 그를 지키려 했지만, 권력은 그녀의 연민까지 파괴했다. 그녀는 사드의 원고를 감추려다 목숨을 잃는다. 그녀의 죽음은 체제의 도덕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드러낸다. 그녀가 쓰러진 순간, 사드는 침묵 속에서 미소 짓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오히려 자유로웠다.

    사드가 죽은 뒤에도 그의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병원의 벽을 넘어 세상으로 번져나갔다. 권력은 그의 육체를 묻었지만, 사상은 묻지 못했다. 필립 카우프만은 이 장면에서 표현의 자유가 인간의 마지막 존엄임을 웅변한다.

    《퀼스》의 줄거리는 결국 한 인간의 광기가 아니라, 자유를 억누르는 세계의 초상이다. 사드는 미친 자가 아니라, 진실을 말한 자였다. 병원장은 의사가 아니라, 체제의 감시자였다. 수녀는 죄인이 아니라, 양심의 화신이었다. 그리고 신부는 성직자가 아니라, 두려움의 화신이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묻는다. 권력이 언어를 빼앗을 때,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하는가. 사드는 답한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이며, 그 말이 사라지는 순간 인간도 죽는다. 그의 피로 적신 벽은 아직도 외친다. 자유는 침묵보다 강하고, 검열보다 오래 산다고.

     

    등장인물

    마르키 드 사드 (Marquis de Sade) : 그는 권력에 맞서는 언어의 반역자이자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욕망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가다. 사드는 글을 통해 체제의 위선을 찢어내며, 검열과 도덕의 가면을 벗긴다. 그는 자유를 말하지만 그 자유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 그는 욕망과 광기를 통해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의 펜은 신의 권위보다 강하고, 그의 말은 감옥보다 넓다. 그는 벽에, 천에, 피에 글을 남기며 인간의 영혼이 결코 침묵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그에게 예술은 도덕의 적이 아니라, 진실의 유일한 증언이다. 카우프만은 그를 미치광이가 아니라 순수한 언어의 순교자로 그린다.

    마들렌 르클레르 (Madeleine LeClerc) : 그녀는 샤라턴 병원의 세탁부이자 순수와 연민의 상징이다. 겉보기엔 조용하고 복종적인 여성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사드의 글을 세상 밖으로 옮기려는 불꽃 같은 용기가 숨어 있다. 그녀는 신앙과 인간성 사이에서 고통스럽게 흔들린다. 사드를 통해 욕망과 자유를 배우지만, 그 자유는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눈빛은 두려움보다 연민이 깊고, 그녀의 행동은 죄보다 정의에 가깝다. 그녀는 체제의 잔혹함이 인간의 순수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증언한다. 마들렌의 죽음은 인간이 신의 이름 아래 잃어버린 자비의 상징이다.

    로이 신부 (Abbé du Coulmier) : 그는 샤라턴 병원의 책임자이자 종교 권력의 대리인이다. 그는 도덕과 신앙을 내세워 환자들을 통제하지만, 그 통제는 사랑이 아닌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는 사드를 교화하려 하지만, 오히려 그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의 신념이 무너진다. 그의 언어는 구원을 말하지만 행동은 처벌을 향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한 채 도덕의 갑옷으로 감춘다. 그러나 그 갑옷이 벗겨질 때, 그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약함을 드러낸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한 권력의 위선을 상징한다. 결국 그의 몰락은 제도의 도덕이 얼마나 쉽게 타락하는가를 보여준다.

    로이 드 페레 신부 (Dr. Royer-Collard) : 그는 정부가 파견한 관료적 의사로, 이성의 이름으로 폭력을 합리화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드의 사상을 불온한 질병으로 규정하고, 교화라는 명분 아래 고문을 시행한다. 그의 권력은 과학과 도덕을 가장했지만, 그 본질은 통제와 공포다. 그는 부인을 소유물로 취급하고, 여성의 자유를 죄로 단죄한다. 그의 시선에는 사랑이 아닌 지배가 있고, 그의 손에는 정의가 아닌 굴레가 있다. 그는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제도화하고, 욕망을 처벌의 도구로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카우프만은 그의 차가운 얼굴 뒤에 감춰진 탐욕과 허위를 정밀하게 해부한다.

    마들렌의 어머니 시몽 르클레르 (Simone LeClerc) : 그녀는 신앙과 체제에 철저히 순응하는 인물로, 딸의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눈에는 순종만이 미덕이고, 권위에 대한 복종이 구원의 길이다. 그러나 그녀의 순종은 결국 딸의 죽음을 부른다.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 체제를 지탱하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상징한다. 그녀의 신앙은 진실이 아니라 안정을 지키기 위한 방패다. 마들렌의 죽음 이후에도 그녀는 침묵하고, 그 침묵 속에서 사회의 공모가 드러난다. 카우프만은 그녀를 통해 권력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가 대중의 순응에 있음을 말한다. 그녀는 시대의 어머니이자, 도덕의 이름으로 자유를 묻은 또 하나의 피해자다.

     

    감독

    필립 카우프만은 1936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인간의 신념과 자유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그는 글을 쓰는 일보다 영화를 찍는 일이 인간의 내면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억압 사이의 충돌을 중심에 둔다. 그는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지 않고, 그 안에 숨은 도덕의 구조를 해체한다.

    그의 초기작 《The White Dawn》(1974)은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 대한 실험이었다. 그는 문명을 폭력으로, 야만을 진실로 묘사했다. 이어서 《The Wanderers》(1979)에서는 청춘과 폭력의 사회적 코드를 탐구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The Right Stuff》(1983)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인간이 우주를 향해 나아가던 시대의 용기와 허영을 동시에 담았다. 그는 영웅주의의 허상을 파헤쳤고, 진정한 인간의 존엄이 무엇인가를 묻는 감독이었다.

    1988년작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은 그의 예술적 전환점이었다. 체코의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그는 정치적 폭력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랑이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줬다. 검열과 억압,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저항의 욕망은 그가 평생 다뤄온 주제였다. 그는 정치가 아닌 인간의 양심으로 세상을 비추는 작가였다.

    《헨리 & 준》(Henry & June, 1990)은 예술과 성, 표현의 경계를 허문 작품이었다. 그는 인간의 육체를 죄로 보지 않았고, 욕망을 창조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 영화는 미국 영화에서 처음으로 NC-17 등급을 받은 작품이기도 했다. 이는 카우프만이 사회의 도덕 기준에 도전한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언제나 검열의 경계에서 진실을 말하려 했다.

    그런 그가 《퀼스》(2000)를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다. 그는 마르키 드 사드라는 인물을 단순한 외설 작가가 아닌,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 철학자로 보았다. 그는 사드를 통해 권력이 진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종교가 도덕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지를 폭로하고 싶었다. 카우프만은 “자유는 언제나 불경스럽게 들린다”는 확신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에게 사드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말한 사람이다. 그는 사드의 언어를 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로 보았다. 《퀼스》는 그에게 있어 또 다른 형태의 설교였다. 그것은 마틴 루터 킹이 말했던 정의의 외침처럼, 침묵 속에서도 울려 퍼지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찬가였다. 그는 도덕이 아니라 진실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카우프만은 종교적 위선과 정치적 검열을 같은 뿌리에서 본다. 그는 신앙이 권력의 손에 들어가면 폭력이 된다고 말했다. 《퀼스》에서 그는 바로 그 폭력의 얼굴을 영화로 해부했다. 그는 말한다. “말을 억누르는 사회는 결국 생각을 죽인다.” 그 말은 영화의 모든 장면 속에 스며 있다.

    그는 사드의 글을 불태우는 신부의 손끝에서 권력의 공포를 읽었다. 그는 피로 글을 쓰는 사드의 얼굴에서 인간의 불굴을 보았다. 카우프만에게 표현의 자유는 예술가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는 그 본능을 억누르려는 세상을 향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의 연출은 과장되지 않았다. 대신 절제된 카메라와 차가운 미장센으로 폭력을 드러냈다. 샤라턴 병원의 어둠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는 조명보다 침묵으로, 음악보다 숨결로 진실을 드러냈다. 그의 연출은 마치 연설처럼 느려지며, 그러나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카우프만은 《퀼스》를 통해 예술가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 그는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국가의 허락이 아닌, 존재의 본질임을 증명했다. 그는 영화의 언어로 인간의 자유를 설파했다. 마치 루터 킹이 연단 위에서 외쳤듯, 카우프만은 스크린 위에서 외쳤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

    그의 생애는 영화보다 더 길고, 그의 영화는 생애보다 더 깊다. 그는 지금도 말한다. 예술은 언제나 불편해야 한다고. 불편한 진실 속에만 인간의 성장과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필립 카우프만은 그렇게, 침묵의 시대에 언어의 혁명을 일으킨 감독이다.

     

    배우

    제프리 러시 (Geoffrey Rush) : 그는 마르키 드 사드를 연기하며 인간 내면의 자유가 어떻게 광기로 비춰지는지를 보여줬다. 그의 연기는 문학적 열정과 광기의 경계를 유영하며, 언어의 폭력을 정직하게 드러냈다. 러시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시대의 침묵을 깨뜨리는 설교자처럼 연기한다. 그의 눈빛은 죄의식보다 신념에 가깝고, 그의 목소리는 절망 속에서도 신념을 설파한다. 그는 검열의 벽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 벽 위에 글을 새긴다. 그의 몸은 갇혀 있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롭다. 러시는 마르키 드 사드를 단순한 음란한 귀족이 아닌, 언어의 순교자로 부활시켰다.

    케이트 윈슬렛 (Kate Winslet) : 그녀는 세탁부 마들렌 르클레르로 출연해 순수와 저항의 상징이 된다. 윈슬렛은 이 인물을 단순한 순종의 여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녀는 마들렌의 내면에서 연민과 욕망, 신념이 부딪히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녀의 시선은 두려움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사드의 글을 몰래 옮기며, 언어의 자유를 이어받는 또 하나의 증인이 된다. 윈슬렛의 연기는 믿음이 아닌 양심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인간의 용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검열의 비극을 완성하고, 그 죽음은 영화의 가장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호아킨 피닉스 (Joaquin Phoenix) : 그는 로이 신부를 연기하며 도덕과 욕망의 충돌을 체현한다. 피닉스의 연기는 내면의 흔들림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신의 뜻을 따르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연민에 흔들린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그 안엔 불안이 흐른다. 그는 사드를 억누르려 하면서도 그 자유를 부러워한다. 피닉스는 신부의 얼굴에 담긴 모순, 즉 구원의 언어로 행하는 억압의 고통을 정확히 표현한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는 인간이 결국 죄의 도구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의 연기는 인간의 신앙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말해주는 강렬한 고백이다.

    마이클 케인 (Michael Caine) : 그는 로이 드 페레 신부 역으로 출연해 이성의 탈을 쓴 권력의 폭력을 구현한다. 케인은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권위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체제의 심문관처럼 행동한다. 그의 얼굴엔 자비가 없고, 그의 손끝엔 통제가 묻어 있다. 그는 여성의 욕망을 죄로 규정하고, 사드의 언어를 질병으로 낙인찍는다. 케인의 연기는 권력의 오만과 잔혹함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그는 사드의 자유를 병으로 치부하며, 그 병을 고치려는 척하지만 결국 자유를 말살한다. 그가 보여주는 냉철함은 체제의 위선을 대변하는 무표정한 얼굴이다.

    아멜리아 워너 (Amelia Warner) : 그녀는 콜라드의 어린 아내 시몽을 연기하며 순수함이 어떻게 억압의 희생양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표정은 순진하지만, 그 속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미묘한 떨림이 숨어 있다. 워너는 남편의 권력 아래에서 점점 질식해가는 여성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녀의 침묵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체제의 두려움에 짓눌린 생존의 방식이다. 그녀의 존재는 영화 속 도덕의 허위를 폭로한다. 권력은 그녀를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소유한다. 워너는 여성의 순수를 권력의 장식으로 삼는 사회의 위선을 고발한다. 그녀의 마지막 시선은 아무 말 없이도 절규처럼 들린다.

     

    평가

    《퀼스》(Quills, 2000)는 개봉 당시부터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가장 대담한 문제작으로 평가받았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단순히 외설의 경계를 시험한 것이 아니라, 도덕의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의 폭력을 고발했다고 보았다. 필립 카우프만은 마르키 드 사드라는 인물을 통해, 언어의 자유가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증명했다. 평단은 그의 연출이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강렬하다고 말했다. 그 절제 속에는 신념의 불길이 숨 쉬었다.

    제프리 러시의 연기에 대해서는 거의 만장일치로 찬사가 이어졌다. 그는 사드를 광기 어린 철학자로 재해석하며, 표현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인간의 초상을 만들어냈다.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러시의 연기는 글쓰기가 어떻게 혁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케이트 윈슬렛 역시 감정의 미세한 결을 따라가는 섬세한 연기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녀의 순수함은 이 영화의 양심이었고, 그녀의 죽음은 자유의 비극을 완성했다.

    호아킨 피닉스의 로이 신부 연기도 주목받았다. 그는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마이클 케인은 권력의 냉혹한 얼굴을 완벽히 구현하며, 종교가 어떻게 폭력의 언어로 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평론가들은 이 네 배우의 연기가 마치 서로 다른 신념의 설교처럼 충돌한다고 평했다. 각자의 진심이 부딪히며, 영화는 거대한 도덕 논쟁의 장이 된다.

    시각적으로도 영화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어두운 병원 복도와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억압과 욕망의 그림자가 교차했다. 미술 감독 마틴 차일즈의 세트 디자인은 검열의 공간을 하나의 종교적 감옥처럼 연출했다. 평론가들은 이 공간이 인간의 두려움을 시각화한 완벽한 무대라고 평가했다. 음악 또한 감정의 깊이를 더했다. 스티븐 워비크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절제된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품었다.

    《퀼스》는 제7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제프리 러시는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미술상과 의상상에서도 후보로 선정되었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그 해 가장 도전적인 주제의 영화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런던 비평가협회와 보스턴 비평가협회에서는 예술성과 정치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이 21세기 초 표현의 자유 논쟁에 불씨를 지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일부 보수 매체는 이 영화를 불편해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야말로 카우프만이 노린 목적이었다. 그는 도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얼마나 익숙한지를 보여주었다. 영화는 금기를 말하면서도 선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도덕의 감옥을 반성하게 했다.

    《퀼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재평가되었다. 2000년대 이후 여러 비평지에서 ‘표현의 자유를 다룬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젊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언론의 검열과 사회적 순응의 은유로 읽었다. 영화학자들은 카우프만이 마르키 드 사드를 ‘글쓰는 마틴 루터 킹’으로 재해석했다고 표현했다. 그는 폭력 대신 언어로 저항했고, 감옥 속에서도 사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평단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퀼스》는 단순한 시대극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정치적 설교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침묵을 강요당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드의 목소리를 듣는다. “언어를 금하는 자가 진실을 두려워한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침묵의 시대에 울려 퍼지는 가장 위대한 외침으로 남겼다.

     

    리뷰 후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든 작품에 대한 생각

    《퀼스》(Quills, 2000)는 불편한 진실을 들이대는 거울 같다. 필립 카우프만은 마르키 드 사드라는 이름을 빌려, 인간이 얼마나 쉽게 권력 앞에서 순응하는 존재로 퇴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드는 감옥에 갇혔지만, 진짜 감옥은 밖에 있었다. 그것은 신앙과 도덕, 그리고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의 벽이었다. 그 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200년이 지나도,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검열의 손잡이를 돌린다.

    사드는 쓰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글로써 인간의 위선을 찢었다. 그가 쓴 단어들은 외설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해부였다. 그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도덕을 경멸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자유가 죄가 되는 세상에서는 진실이 언제나 불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드를 외설이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그의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샤라턴 병원은 지금의 사회와 닮았다. 겉으로는 치료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순응을 강요한다. 현대의 검열은 더 세련되고, 더 은밀하다. 종교 대신 여론이 있고, 신부 대신 댓글이 있다. 도덕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매장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제단에 바친다. 사드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희의 신은 사라졌지만, 심판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표현의 자유는 존재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언제나 ‘선 넘었다’는 말로 덮인다. SNS의 익명성은 자유의 도구가 아니라 도덕 경찰의 방패가 되었다. 사람들은 검열을 싫어하지만, 스스로 검열의 일원이 되기를 자청한다. 권력이 명령하지 않아도, 대중은 알아서 침묵한다. 그것이 더 효율적인 통제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드는 글을 잃고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았다. 그는 더러운 손으로 벽에 글을 남기며 말했다. “나는 아직 존재한다.” 그 문장은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인간은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한, 여전히 의미를 만든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자유보다 안전을 택하고, 의미보다 이미지에 중독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주인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 속의 상품이 된다.

    《퀼스》는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 속에서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다. 권력은 언제나 도덕을 이용해 자유를 누른다. 종교는 믿음을 팔고, 대중은 정의를 소비한다. 그 사이에서 예술만이 유일하게 저항한다. 이 영화는 말한다. 자유는 결코 허락받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야 하는 것이다. 사드가 그랬듯, 진실을 말하는 일은 언제나 더럽고 위험하다. 하지만 그 더러움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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