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

    들어가는 말

    심장병 진단을 받은 다니엘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일을 쉬어야 하지만, 정부는 그에게 ‘노동 가능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생계유지를 위한 복지 신청은 형식적 질문과 기계적인 판정으로 좌절되며, 그는 서서히 국가 시스템과 대면하게 된다. 인간적 존엄보다 절차를 우선시하는 구조는, 병든 개인에게조차 ‘증명’을 강요한다.

    이윽고 다니엘은 같은 처지의 젊은 여성 케이티와 인연을 맺으며, 제도 너머의 따뜻한 인간성을 발견하려 애쓴다. 그러나 복지라는 이름의 구조물은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다니엘은 점점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제도는 그를 구제하지 않고, 오히려 시험하며 파괴한다.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운명적 비극처럼, 다니엘의 이야기는 현대 복지 시스템이라는 ‘국가 권력’과 ‘인간 개개인’ 사이의 충돌을 냉정히 보여준다. 인간 존엄이 관료주의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 그 현실은 무대 위의 비극보다 훨씬 더 뼈아프다.

     

    줄거리

    심장 질환을 앓고 있는 중년의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일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그가 기대고자 했던 복지 제도는 냉정한 사무적 절차와 기계적 판단으로 응답한다. 의료진의 진단서보다 더 우선시되는 것은 전화상담원의 질문지이며, 그의 노동 가능 여부는 전혀 만난 적 없는 심사자의 컴퓨터 입력에 의해 결정된다. 다니엘은 노동을 중단할 수도 없고, 실업자로서 혜택을 받을 수도 없는, 제도 밖의 존재가 된다.

    그는 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구직활동을 가장해야 하며,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수당 지급이 중단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인터넷 사용조차 익숙하지 않은 그는 정부의 디지털화된 행정 시스템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손으로 쓴 구직 이력서가 비웃음을 사는 풍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조용히 무너진다. 괴테가 지적했던 ‘합리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비인간성’은, 이 영화의 복지 시스템에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어느 날 다니엘은 복지 사무소에서 어린 두 아이와 함께 분노에 찬 젊은 여성 케이티를 목격한다. 그녀는 단지 약속 시간을 놓쳤다는 이유로 지원금이 끊기게 되고, 항의는 통하지 않는다. 다니엘은 그녀와 아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고, 그 인연은 두 가족의 엇갈린 삶을 연결 짓는다. 두 사람 모두 시스템의 틈바구니에서 버림받았다는 공통의 상처를 지닌다. 케이티는 아이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빈곤의 수렁 속에서도 발버둥치고, 다니엘은 자신보다 그녀를 더 걱정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다니엘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도에 점점 고립되며, 불합리한 행정절차에 항의하는 전단지를 복지센터 벽에 붙이다가 경찰에 연행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그는 "나는 개가 아니다. 인간이다"라는 문장을 반복하며, 존재로서의 존엄을 지키려 애쓴다. 그것은 괴테가 작품 속에서 수없이 되묻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현대적 형상화다.

    도움을 요청하는 인간에게 조건과 서류, 자격과 태도만을 내세우는 제도는 점점 다니엘을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어낸다. 오랜 고용과 세금납부 이력조차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숫자일 뿐이며, 그는 스스로를 향한 존경마저 잃어간다. 복지 제도의 이면에는 ‘책임’보다는 ‘관리’가, ‘연대’보다는 ‘통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 후반부, 다니엘은 케이티의 집 수리를 도우며 아이들과 웃음을 나누지만, 그의 몸은 점점 한계를 드러낸다. 최종적으로 복지 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지만, 이미 그는 오랜 싸움과 고립 속에서 너무 많이 지쳐 있다.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복지 사무소에 제출하려던 편지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삶과 인간으로서 지키고자 했던 자부심을 고백한다.

    괴테의 문학 속 인물들이 그러했듯, 다니엘 블레이크 또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끝내 균형을 찾지 못한 채 쓰러진다. 그러나 그가 남긴 목소리는 한 명의 개인이 제도와 사회에 어떻게 압도당하는지를 날카롭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등장인물

    다니엘 블레이크 (Daniel Blake)
    은퇴를 앞둔 나이의 목수이자, 심장병으로 인해 노동을 중단해야만 했던 인물이다. 그는 사회 시스템 안에서 ‘개인’으로 존재하고자 하지만, 제도는 그의 생리적 고통을 객관적 수치로만 환산한다. 셸링의 철학처럼, 그는 이성과 체계로 대표되는 사회 속에서 실존적 자유를 잃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저항적 주체로 남는다. 그의 침묵은 체념이 아닌, 깊은 내면의 외침이다.

    케이티 모건 (Katie Morgan)
    런던 외곽으로 쫓겨나듯 이주해온 두 아이의 싱글맘. 그녀는 시스템이 ‘정상가족’을 전제로 설계되었음을 몸소 증명한다. 서류 상으로는 비정상이며, 절차 상으로는 불량하게 기록되지만, 그녀는 아이들에게 사랑과 존엄을 남기려 애쓴다. 셸링이 말한 ‘자연과 정신의 분열’ 속에서, 케이티는 모성이라는 본능과 사회적 조건 사이의 갈등을 감내하며 버텨낸다. 그녀의 눈빛은 제도화된 이성이 감지하지 못하는 생의 진실을 품고 있다.

    데이지 (Daisy)
    케이티의 딸로, 아직 제도의 폭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수한 시선의 소유자다. 그녀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따뜻함을 믿으며 다니엘을 가족처럼 받아들인다. 셸링의 관점에서 데이지는 ‘무의식의 세계’이자 아직 분열되지 않은 자연의 형상이다. 복지의 구조 안에서 그녀는 아무 권리도 없는 존재지만, 그 미소와 믿음은 시스템이 간과한 ‘의미의 원형’을 상기시킨다. 사회가 잊은 본질을 되묻는 어린 주체다.

     (Ann – 복지센터 직원)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면서도 인간적 양심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이다. 공식적 지침과 인간적 동정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그녀의 권한은 극히 제한된다. 셸링 철학에서 그녀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분열된 인물이며, ‘자유의지’를 가졌지만 실천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연민은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무기력한 방관자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은 제도적 언어에 잠식되지 않았다.

    조브센터 관리자 (Jobcentre Manager)
    복지센터의 운영을 총괄하며, 체계적 효율성과 규율을 중시하는 전형적 관료주의자다. 그는 개개인의 사정을 ‘데이터’로 간주하며, 통제된 질서를 벗어나는 이들을 시스템의 실패로 규정한다. 셸링이 비판한 ‘객관화된 이성’의 전형으로, 자유 없는 체계 안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공허하며, 진실 앞에서는 불완전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는 결국 시스템의 수호자이자 동시에 그 희생자다.

     

    감독

    켄 로치는 1936년 영국 워릭셔 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연극과 텔레비전 연출에 뛰어든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노동자 계층의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TV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영화계에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꾸준한 연대와 문제의식으로 독자적 위치를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현실을 외면하는 미학보다,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미학을 지향한다.

    대표작으로는 《Kes》(1969), 《Riff-Raff》(1991), 《My Name is Joe》(1998), 《Sweet Sixteen》(2002), 그리고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2006) 등이 있다. 이들 영화에서 로치는 노동자, 실직자, 청년층 등 사회 주변부의 인물을 통해 사회 구조의 비윤리성을 꾸준히 고발했다. 그는 단지 현실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도덕적 성찰을 요청한다. 칸트가 말한 ‘실천이성’은 그의 카메라 안에서 윤리적 각성을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영국 정부가 시행한 복지 축소 정책과 그에 따른 행정적 비인간성을 고발하고자 기획되었다. 로치는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실업 수당 심사 과정에서 좌절한 수많은 실제 시민들의 증언을 접하고, 이를 픽션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단지 ‘수혜자’가 아니라 ‘존엄한 존재’로서 대우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칸트가 주장한 바처럼, 인간은 결코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로치는 이 영화를 통해 제도화된 복지 시스템이 인간을 수단화하고 있다는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 문제 제기는 단지 고발에서 끝나지 않고, 관객 각자에게 책임 있는 실천의 가능성을 묻는 데까지 이른다.

     

    배우

    데이브 존스 (Dave Johns) :
    데이브 존스는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 역을 맡아, 제도의 논리 속에서 분리된 인간의 고유성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단자(monad)처럼, 그는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도덕률에 따라 행동한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는 풍부한 감정과 절제된 연기로 현실적 비극 안의 도덕적 질서를 구현한다. 관객은 그를 통해 선한 인간이 어떤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도 조화를 추구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헤일리 스콰이어스 (Hayley Squires) :
    헤일리 스콰이어스는 케이티 모건 역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적 존엄을 지키려는 강인한 어머니를 연기한다. 그녀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말하는 ‘최선의 세계’에 속한 하나의 단자로서, 혼돈 속에서도 자신의 질서를 만든다. 불안정한 사회 조건 속에서도 아이들과의 유대를 통해 일관된 윤리적 중심을 유지하며, 연약함과 강함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의 연기는 영화의 감정적 진폭을 이끄는 중심축이다.

    브라이언 라이터스 (Briana Shann) :
    브라이언 라이터스는 케이티의 딸 데이지 역으로 출연하여, 성찰 이전의 순수한 단일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판단이나 규칙 이전의 자연스러운 선함을 드러내며, 라이프니츠가 말한 조화로운 본성의 씨앗을 품은 존재로 그려진다. 아이의 무심한 행동 하나하나가 거대한 복지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녀는 서사적 비중은 작지만, 영화 전체의 윤리적 균형을 잡아주는 중요한 조화의 축이다.

    케이트 러터 (Kate Rutter) :
    케이트 러터는 복지 사무소의 직원을 연기하며, 시스템 내부에서 인간적 동정을 잃지 않으려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는 복지 제도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이성과 감정 사이의 조화를 시도하지만, 역설적으로 무력한 존재로 남는다.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는 제한된 인식 속에서도 선의지를 실현하려 애쓰는 단자의 모습이다. 짧은 등장임에도, 그녀의 존재는 영화가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 인간 간의 이해 가능성을 보여주게 한다.

    셰론 퍼시벌 (Sharon Percy) :
    셰론 퍼시벌은 복지 사무소 관리자 역할로 등장하여, 무표정한 체계의 대표자로 기능한다. 그녀는 윤리적 판단보다 절차와 기준을 우선시하며, 개인의 다양성을 삭제한 제도적 평면성의 구현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사유에 따르면, 그녀 역시 자신만의 논리적 세계 안에서 조화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인물의 차가운 태도는, 사회 전체가 인간적 사유보다 효율을 우선할 때 어떤 세계가 만들어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평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제69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사회비판 영화의 본질적 가치와 미학적 완성도를 동시에 인정받았다. 다수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현대 복지국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한 도덕적 선언’이라 평가했다. 특히 The Guardian은 "켄 로치 감독이 노동 계층의 실존을 사회 철학적 맥락에서 증명해냈다"고 극찬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국가란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조건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국가가 오히려 자유를 제약하는 역설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폭로한다. 평론가들은 다니엘의 고통을 '시민이 국가를 통해 자기 인식을 이루지 못하는 비극'으로 해석하며, 이는 헤겔의 철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서사라 평가한다. 사회가 진보할수록 제도는 세련되어지지만, 주체는 점점 사라진다.

    영국 아카데미(BAFTA)에서는 ‘최우수 영국 영화상’을 수상했으며, 시드니 영화제에서도 최고상인 시드니 필름 프라이즈를 수상하였다. 다수의 유럽 영화제에서 감독상, 각본상, 관객상을 휩쓴 이력은 영화가 단지 정치적 고발을 넘어서 시대정신을 담아냈음을 입증한다. 로치의 카메라는 단순한 묘사가 아닌,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게 만드는 철학적 촉매제다.

     

    리뷰 후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든 작품에 대한 생각

    다니엘은 일할 수 없다. 의사는 분명히 그랬고, 시스템은 듣지 않았다. 복지국가는 서류와 콜센터 음성 사이에 숨어 있고, 그는 매뉴얼을 이해하지 못한 죄로 굶는다. 기계는 잘 돌아간다. 단지 인간이 맞지 않을 뿐이다. 그는 그 세계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만든 자유의 초상이다. 위선적으로 정비된 사회에서 인간이란 지워지기 가장 쉬운 이름이다.

    로치는 영웅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아무것도 되지 못한 한 인간을 내세웠다. 그는 불쌍하지 않다. 다만 불필요할 뿐이다. 자유의지는 여기서 비웃음의 대상이고, 선택은 허구다. 서명하라는 말 외엔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는다. 다니엘은 복지센터 복도에 서서 문을 두드리지도 못하고, 항의도 못한 채 기다린다. 시스템의 정의란 응답하지 않음으로 귀결된다. 불안과 부조리는 말없이 사람을 밀어낸다.

    이 영화는 실존주의가 부끄러워할 만큼 솔직하다.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잉여다. 아무도 다니엘에게 선택하라 말하지 않았고, 책임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거기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죽었다. 의미 없이, 체계 안에서.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실존적 고립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타인은 없다. 시스템만이 남고, 인간은 빠져나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