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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은 이들은 없다. 이 영화 속 청춘들처럼, 죄와 실수로 얼룩진 지난날에도 다시 시작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 로비는 범죄로 인해 사회봉사를 명령받지만, 그 속에서 같은 처지의 이들과 만나며 희망의 끈을 다시 잡는다. 우연히 알게 된 위스키의 세계는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된다.
스코틀랜드의 전통문화인 위스키를 매개로, 영화는 계급 사회가 어떻게 젊은이들의 가능성을 가로막는지를 조용히 말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절망보다는 유머와 따뜻함으로 삶의 가능성을 그린다. 로비가 보여주는 선택과 변화의 여정은, 마치 링컨이 말하던 인간 본연의 존엄과 평등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앤젤스 셰어》는 묻는다. 과거가 무겁더라도,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는 과연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가?
줄거리
로비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젊은이다. 그는 반복된 폭력과 범죄로 인해 법정에 서고, 구속 직전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다. 대신 사회봉사 명령이 내려지고, 그는 그곳에서 라이노, 앨버트, 모 같은 친구들을 만난다. 모두 세상에서 밀려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이다.
봉사 활동을 감독하는 해리는 이 청년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판단보다는 이해로, 꾸짖기보다는 품어주는 방식이다. 해리는 이들을 데리고 스코틀랜드 전통 위스키 증류소를 견학하게 된다. 바로 이 순간, 로비는 생애 처음으로 위스키라는 세계에 눈을 뜬다. 미묘한 향과 숙성의 철학은 로비의 삶에 질문을 던진다. “나도 무언가를 제대로 느끼고, 만들 수 있는 사람일까?”
해리는 로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테이스팅과 감별 기술을 가르친다. 로비는 위스키에 놀라운 감각을 보인다. 그러던 중, 한 병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희귀 위스키가 경매에 나온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로비는 삶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마지막 도전을 결심한다. 범죄가 아닌 기술과 지식으로 이룰 수 있는 전환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로비는 작은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누군가는 그것을 또 다른 범죄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처음으로 어떤 꿈을 위해 함께 움직였다. 그 끝에 로비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인생의 문 앞에 선다.
등장인물
로비 (Robbie) : 로비는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젊고 거친 삶을 살아왔지만,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배운다. 폭력 전과가 있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몰랐던 감별 능력이 있었다. 위스키를 통해 그는 자신이 세상의 쓰레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의 고뇌와 변화는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도덕적 울림의 핵심이다.
해리 (Harry) : 해리는 사회봉사 감독관으로 등장하지만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다. 그는 청년들을 사람답게 대한다. 법이 이들을 교정하지 못했을 때, 그는 사람다움으로 그들을 붙든다. 해리는 로비의 숨은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해주는 어른이었고, 기회를 주는 사람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다. 그의 태도는 작은 선의가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앨버트 (Albert) : 앨버트는 사회봉사 팀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다. 어리숙하고 유쾌하지만, 그 속엔 현실을 향한 묘한 체념이 녹아 있다. 그는 쉽게 좌절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웃을 줄 아는 인물이다. 무게 잡지 않으면서도 친구를 위해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함께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모 (Mo) : 모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특이한 면이 많은 캐릭터다. 쾌활하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을 보인다. 그는 사회에서 조금은 비껴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상징처럼 느껴진다.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가치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걸, 모는 말없이 행동으로 증명해낸다. 그는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영화의 메시지를 단단하게 지지한다.
라이노 (Rhino) : 라이노는 외적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정작 마음속은 무척 여린 인물이다. 충동적이지만 의리 있는 성격 덕분에 팀 내에서 중심을 잡아준다. 그는 종종 거칠게 보일 수 있지만,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드는 인물이다. 그의 존재는 약자끼리도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조용히 말해준다.
감독
켄 로치는 1936년 영국 워릭셔에서 태어났다. 중산층 출신이지만, 그는 늘 사회의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옥스퍼드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결국 연극과 텔레비전을 택하며 인간의 이야기를 전하는 길을 걸었다. 1960년대 BBC에서 만든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시작으로, 그는 이른 시기부터 노동계급과 빈곤층의 삶을 꾸준히 조명해왔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이념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정직한 관찰에서 출발했다. 《케스》(1969)는 노동자 계급 소년과 매가 주는 위로를 그렸고, 《빵과 장미》,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같은 영화는 복지와 인간 존엄성 문제를 다뤘다. 그는 상업 영화의 공식을 거부했고, 카메라를 낮게, 인물을 가깝게 두며 그들의 현실을 진심으로 담아내려 했다.
《앤젤스 셰어》는 그런 그가 조금 더 따뜻하게, 유머를 담아 만든 작품이다. 켄 로치는 영화 속 로비처럼 현실의 청년들이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사회에서 밀려나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도 존엄과 가능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위스키라는 전통문화 안에 숨겨진 계급 구조를 유쾌하게 비틀면서, 동시에 인생의 재출발이란 주제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 것이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말한다. 인간은 처벌보다 기회를 통해 성장하며, 정의는 법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이 따뜻한 희극 속에도, 켄 로치 특유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사회적 양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배우
폴 브래니건 (Paul Brannigan) : 로비 역을 맡은 폴 브래니건은 실제로도 어려운 환경을 딛고 자란 인물이다. 비전문 배우였던 그는, 감독 켄 로치가 거리에서 발굴한 원석에 가까웠다. 그의 연기는 기술보다 진심에서 출발한다. 폭력과 절망 속에서도 삶의 가능성을 움켜쥐려는 로비의 모습은 폴 본인의 삶과 겹쳐지며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존 헨쇼 (John Henshaw) : 해리 역을 맡은 존 헨쇼는 영국 드라마와 코미디에서 활약해온 베테랑 배우다. 그가 연기한 해리는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인물이다.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청년들의 상처를 감싸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헨쇼의 연기는 유머와 진심 사이를 오가며, 작은 선의가 사람을 어떻게 일으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게리 메이트랜드 (Gary Maitland) : 앨버트 역의 게리 메이트랜드는 코믹하고 천진난만한 매력을 가진 배우다. 이전에도 켄 로치의 작품에 출연한 바 있으며, 리얼한 말투와 서민적인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데 탁월하다. 그는 앨버트를 통해 진심은 화려하지 않아도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해낸다.
윌리엄 루앤 (William Ruane) : 라이노 역을 맡은 윌리엄 루앤은 내면의 분노와 충동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낸다. 그는 이미 켄 로치의 다른 영화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라이노는 겉으론 거칠지만, 친구를 위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크다. 루앤은 그런 이중적인 인물의 복잡함을 무리 없이 소화해낸다.
제슬린 펠라린 (Jasmin Riggins) : 모 역을 맡은 제슬린 펠라린은 무심한 듯 진솔한 연기로 눈길을 끈다. 모는 말수가 적지만, 존재 자체가 서사의 균형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펠라린은 대사보다는 표정과 태도로 캐릭터를 완성하며, 사회적 틀 밖에 있는 인물의 외로움과 끈질김을 조용히 그려낸다.
평가
이 영화는 2012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당시 심사위원단은 “웃음과 희망이라는 무기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정면으로 바라본 작품”이라 평가했다. 켄 로치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과 유머의 균형이 빛난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영국 <가디언>은 “켄 로치가 다시 한 번, 무거운 주제를 가볍지 않게 다루는 법을 보여줬다”고 전했고, <인디와이어>는 “이 영화는 희망을 말하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평했다. 특히 로비 역을 맡은 폴 브래니건의 생생한 연기에 대한 찬사가 많았다. 연기 훈련을 받지 않은 비전문 배우가 이렇게 진솔한 감정을 이끌어낸 건 드문 일이라며, 그 자체로 영화의 메시지와 닮았다고 언급되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단순한 성장담이 아닌, 신자유주의 이후의 사회에서 청년들이 얼마나 구조적으로 소외되어 있는지를 풍자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위스키라는 전통문화가 가진 계급적 상징을 유쾌하게 꼬집은 점도 높게 평가됐다.
리뷰 후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든 작품에 대한 생각
이 영화 속 청춘들은 제도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선택하지도 않았고 동의하지도 않은 현실 속에 던져졌다. 사회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만, 아무도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앤젤스 셰어》는 바로 그 틈에서 태어난 이야기다.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말, 여기서 꽤 적절하게 들린다.
로비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끝내 다른 삶을 택한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기 본질을 선택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기를 거부하고, ‘탈주’를 감행한다. 하지만 그 탈주는 위대하지 않다. 오히려 우습고 작아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좋다. 인생의 전환이란 대단한 각오보다, 얼떨결과 충동에서 비롯된다는 걸 솔직하게 보여준다.
결국 이 영화는 묻는다. 인간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언제부터인가? 로비는 자유를 선택하지만, 그 자유는 책임이라는 껄끄러운 그림자를 달고 있다. 그는 법을 다시 어기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떠난다. 그 모습은 실존적 선택의 본질을 드러낸다. 옳고 그름보다, 어떤 삶을 감당할 것인가의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