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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집에 있었지만》(Ich war zuhause, aber..., 2019)
    《나는 집에 있었지만》(Ich war zuhause, aber..., 2019)

    들어가는 말

    소년은 어느 날 사라졌다가, 멀쩡한 얼굴로 다시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 공백은 너무 길었다. 남겨진 이들은 말없이 무너졌고, 소년의 귀환은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시작이 아닌, 상실의 여운을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 감독은 사건보다 감정의 파편을 좇는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장면들 속에서 삶의 단절과 존재의 불확실성이 조용히 드러난다.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서로에게 닿지 못한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말은 그저 공기 중에 흩어진다. 침묵은 어색하지 않으며,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까운 언어처럼 느껴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한 눈빛을 한다. 말하지 않아도 상처는 드러나고, 외면하는 만큼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카메라는 결코 다가가지 않는다. 멀리서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그 거리감이야말로 이 영화가 품은 철학이다. 누구도 완전히 이해받을 수 없고, 누구의 삶도 완전히 공유될 수 없다. 감독은 그 사실을 관객에게 낯설지 않게, 그러나 무겁게 전달한다. 존재의 상실이 일상이 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줄거리

    소년이 사라졌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조용히. 며칠 후, 그는 돌아왔다. 몸은 멀쩡했지만 마음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 부재가 남긴 자국을 지우지 못한다. 어머니 아스트리드는 소년의 실종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과거와 싸우고, 삶을 바로잡으려 애쓴다. 그러나 일상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아스트리드는 말보다 몸짓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아이와의 거리, 연인과의 침묵, 주변 사람들과의 엇갈림이 그녀의 고통을 대신 말해준다.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은 누구 하나 감정을 직접적으로 터뜨리지 않는다. 대신 묵묵히 살아가며, 서로를 멀리서 바라본다. 이들은 말로는 다가갈 수 없는 경계 안에서, 고립된 채로 존재한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연극을 준비하는 장면은 인물들이 말하는 법을 배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대사 한 줄 한 줄에 감정이 쌓이고, 감정은 언어보다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아이들이 연습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단지 극 중 극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정서와 겹쳐진다. 현실의 인물들도 그처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단지 무대가 없고, 조명이 없을 뿐이다.

    영화는 선형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사건은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는 공백이 존재하며, 그 공백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인물들은 그 안에서 말없이 움직이고, 말없이 멈춘다. 일상은 계속되지만, 무언가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다. 그것은 관계이고, 감정이고, 존재 그 자체다.

     

    등장인물

    아스트리드 (Astrid) : 아스트리드는 실종됐던 아들을 되찾았지만, 그가 돌아온 뒤에도 삶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강한 사람처럼 보이려 애쓰지만, 내부는 무너져 있다. 감정을 말로 풀기보단 몸짓으로 견딘다. 일상은 계속되지만, 고통은 꾹 눌러 담긴 채 그녀의 모든 행동에 묻어난다. 그녀의 침묵은 비명보다 크다.

    필립 (Phillip) : 필립은 이유 없이 사라졌고, 아무 말 없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설명도, 후회도 없다. 아이지만 어른보다 고요하고, 그 고요는 의심을 낳는다. 그는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말은 없지만, 몸으로 표현되는 거리감이 있다. 그는 살아 있으나, 어딘가로 여전히 떠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플로렌스 (Florence) : 플로렌스는 필립의 여동생이자 아스트리드의 또 다른 짐이다. 그녀는 주변의 갈등 속에서 조용히 관찰하는 역할을 맡는다. 크게 드러나는 행동은 없지만, 오히려 그 점이 그녀를 더 눈에 띄게 만든다. 불안정한 가정 안에서 어린 나이에 어른처럼 굴어야 하는 모습은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클라스 (Klaus) : 클라스는 아스트리드의 연인이지만, 그녀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도우려 하고, 곁에 있으려 하지만, 결국 벽에 부딪힌다. 사랑은 있지만, 서로를 구원할 힘은 없다. 그는 책임과 사랑 사이에서 흔들리며, 결국엔 관계의 경계에서 머문다. 그의 무력함은 이 영화의 정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연극 교사 (Theatre Teacher) : 연극 교사는 아이들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가르친다. 그는 무대 위에서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법을 가르치지만, 정작 아이들은 말보다 움직임으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 이 인물은 극 속에서 감정과 언어의 틈을 보여주는 매개자다. 관객에게 언어의 무기력함과 동시에 연극의 힘을 되새기게 만든다.


     

     

     

    감독

    앙겔라 샤넬레크는 1962년 독일 남부의 알렌에서 태어났다. 배우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지만, 곧 카메라 뒤로 자리를 옮겼다. 베를린 영화예술학교(DFFB)에서 연출을 공부하며, 말보다는 침묵이, 설명보다는 여백이 더 깊은 이야기를 만든다는 확신을 품었다. 그녀는 1990년대 초부터 독립영화 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일관되게 삶의 단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왔다.

    샤넬레크는 흔히 ‘베를린 학파’ 감독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된다. 그녀의 영화는 사건보다 그 여운에 집중한다. 《오르리의 길》(2003), 《마이슬링》(2007) 등에서 그녀는 인물 간의 침묵과 거리, 그리고 말로 다 닿을 수 없는 감정의 단층을 탐색했다. 그녀의 연출은 시적이고 철학적이며, 동시에 차갑고 절제되어 있다.

    《나는 집에 있었지만》은 그녀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아이의 실종과 귀환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다. 샤넬레크는 개인적인 상실의 기억과, 인간 존재의 불가해함에 대한 사유를 스크린에 옮기고자 했다. 그녀는 실제로도 육아와 삶의 균형 속에서 일상의 파열음을 겪었고, 그 체험이 작품의 정서에 깊게 스며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배우

    마렌 에그에르트 (Maren Eggert) : 아스트리드 역을 맡은 마렌 에그에르트는 감정을 내세우지 않고도 고통을 표현하는 배우다. 그녀는 겉으론 단단하지만 내면은 부서져 있는 인물을 절제된 연기로 그려낸다. 그녀의 연기는 침묵 속에 서사를 담고, 시선 하나에도 인물의 모든 감정이 녹아 있다.

    제이코브 라스첸 (Jakob Lassalle) : 필립 역의 제이코브 라스첸은 특별한 감정 표현 없이도 존재감을 남긴다. 그는 말없이 화면을 채우며, 마치 어떤 설명도 필요치 않은 듯한 얼굴로 서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상실과 거리감을 무심하게 담아내는 힘이 있다.

    클라스 뢰버 (Claus Løbner) : 영화에서 클라스는 아스트리드의 연인 역할로 등장한다. 클라스 뢰버는 가까이 있지만 결코 닿지 않는 남자의 역할을 절제된 자세로 표현한다. 말보다 시선과 행동으로 상대와의 간극을 보여주며, 인간 관계의 단절을 담담히 드러낸다.

    프란츠 로고브스키 (Franz Rogowski) : 짧은 등장에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다. 프란츠 로고브스키는 특유의 신체 언어와 날카로운 감정 표현으로 극의 긴장을 환기시킨다. 말보단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하며, 존재만으로도 극의 정서를 한층 묵직하게 만든다.

    다닐라 주그레브 (Danila Zgribnev) : 조연이지만 그 정적 속에서 놓칠 수 없는 인물이다. 다닐라 주그레브는 학생 역할을 맡아 연극 장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혼란을 표현한다. 감정의 깊이를 억누르며 말하는 장면들은 극 중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열쇠로 작용한다.

     

    평가

    이 영화는 2019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고, 앙겔라 샤넬레크는 그해 최우수 감독상(은곰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이 “형식과 감정의 경계를 허무는 독창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말보다 침묵이, 사건보다 여운이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명확히 갈렸다. 인디와이어(IndieWire)는 “불친절하지만, 정직하다”고 표현했고, 가디언(The Guardian)은 이 영화를 “인내를 요구하는 명상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재 속에서 진실을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대중성은 크지 않았다. 감정의 파열 대신 침묵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관객에게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침묵으로 말하는 영화’, 혹은 ‘현대적 오즈의 귀환’이라 불릴 만큼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상업적 성공보다 영화 언어의 실험성과 인간 내면에 대한 철학적 접근으로 더 길이 남을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뷰 후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든 작품에 대한 생각

    《나는 집에 있었지만》은 부재로 가득 찬 영화다. 누가 사라졌는지보다, 누가 남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카메라는 침묵을 찍고, 인물은 말을 버린다. 설명이 없다. 그래서 불친절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친절함 속에 진실이 들어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인을 이해한 척하며 살아가는가.

    이 영화는 삶을 재건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회복은 없다. 그냥 견딘다. 사르트르가 말한 대로, 인간은 의미 없는 세계에 던져진 존재다. 아스트리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쩌다 삶에 갇힌 인물이다. 선택은 했지만,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 공허 속에서 하루를 살아낸다. 말하자면, 그것이 존재다.

    실존주의는 선택의 자유를 말하지만, 동시에 책임을 말한다. 이 영화는 그 무거운 책임을 끝까지 떠안고 간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감정은 설명되지 않고, 고통은 정리되지 않는다. 인물들은 해답 없이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더 진짜 인간의 모습이다.

    영화가 끝나고도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는다. 그것이 불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본디 불편한 것이다. 모든 질문에 답이 있다면, 그건 종교이지 예술이 아니다. 샤넬레크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고요히 묻는다. 이 불완전한 삶을, 당신은 감당할 수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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