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청연》 시대의 요구와 개인의 열망이 충돌할 때 개인의 꿈을 선택한 자

영화를 좋아하세요? 2025. 9. 30. 16:35
반응형

《청연》(Blue Swallow, 2005)
《청연》(Blue Swallow, 2005)

 

들어가는 말

1930년대, 하늘을 날고자 했던 한 여성이 있었다. 이름은 박경원. 조국은 식민지였고, 하늘은 일본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날고 싶었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비행을 선택했다. 기술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명예가 아니라 꿈이었다. 그녀는 조국이 아닌 하늘을 향했다. 많은 이들이 그녀를 비난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시대가 그러했노라고. 그러나 시대가 누구였는가. 시대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박경원은 그 틀을 깼다. 그녀는 허락받지 않은 여성이었다. 동시에 허락받지 않은 조선인이었다. 두 겹의 장벽 속에서 날고자 했다. 그 비행은 단순한 이륙이 아니었다. 억압에 대한 침묵의 항의였다.

비행복을 입는 순간, 그녀는 조선 여인이 아니었다. 파일럿이었다. 그녀의 국적은 꿈이었다. 조국은 침묵했고, 민족은 외면했다. 그녀는 조국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국도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단절은 그녀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비행은 나름 스스로에게는 진실했다.

그녀는 조종간을 쥔 비행 역사를 개척한 조선 여성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역사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지워진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청연은 그녀의 존재를 다시 불러낸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그녀를 잊을 자격이 있는가.

 

줄거리

1930년대 조선, 이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대였다. 하늘을 꿈꾸는 건 허락된 자들의 몫이었다. 박경원은 그 허락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하늘을 향한 갈망은 법보다 강했고, 제도보다 높았다.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비행을 배울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조선이 침묵하는 동안 그녀는 조종간을 잡았다.

비행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의 상징이었다. 땅 위의 억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박경원은 처음 비행한 날을 잊지 않았다. 그날 그녀는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가 되었다. 여성이었고, 조선인이었고, 파일럿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원치 않던 정체성이었다. 그녀는 단지 하늘을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사람들은 땅에서 분노했다.

그녀의 조종석에는 민족이 없었다. 오직 바람과 고도만이 있었다. 사람들은 묻지 않았다. 왜 그녀가 조선을 떠났는지. 왜 그녀가 일본 군용기를 탔는지. 사람들은 판단했고, 역사에는 여백이 없었다. 그녀는 친일파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침묵당한 자는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녀의 선택은 분명했다. 민족이 아닌 하늘이었다. 그러나 그 하늘이 배신할 줄은 그녀도 몰랐다.

사랑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롭지 못했다. 조국도, 연인도, 그녀를 온전히 품지 못했다. 그녀는 오직 비행기 안에서만 살아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죄인이었다. 비행을 멈추면 아무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계속 날았다. 언젠가는 누군가 알아줄 거라 믿었다. 언젠가는 그녀의 하늘이 조국의 하늘이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끝내 도달하지 못했다. 그녀는 추락했다. 비행기는 부서졌고, 꿈도 함께 찢어졌다. 역사는 그녀를 놓쳤고, 세상은 그녀를 오해했다.

 

등장인물

박경원 : 조선이라는 이름조차 온전치 않았던 시대에 하늘을 꿈꾼 인물이다. 그녀의 비행은 기술이나 경력 이전에 존재에 대한 선언이었다. 주변은 날지 말라고 말했고, 현실은 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종간을 잡았다. 그녀는 조국도, 가문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비행했다. 그래서 그녀의 꿈은 순수하면서도 위험했다. 그녀는 바람과 중력을 상대로 싸웠고, 결국 그 싸움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그녀의 낙하는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하늘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였다.

한지혁 : 박경원의 연인이자 시대의 이중성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청년이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그녀만큼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인으로서, 남성으로서, 그는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 그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그녀의 꿈만큼 높지 않았다. 그는 옆에 있었지만 그녀의 하늘에는 함께 오르지 못했다. 그 안타까움은 지혁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스며 있었다. 그는 시대의 아들이었고, 동시에 그 시대의 벽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의 비행을 멀리서 지켜보는 목격자에 머물렀다.

기베 마사코 (Kibe Masako) : 일본 비행학교의 유일한 여성 수강생 중 한 명으로, 박경원의 경쟁자이자 동료이다. 처음에는 박경원을 경쟁자로 보고 경계한다. 조선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려 하지만, 박경원의 실력 앞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겉으로는 냉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 파일럿으로 살아가는 데 따르는 차별과 억압을 꿋꿋하게 견디고 있는 인물이다. 체제 안에 순응하는 척하지만, 마음속에는 강한 반발심과 자기 의지가 있다. 박경원과의 관계는 단순한 경쟁이 아니다. 질투에서 시작해 점점 이해로, 이해에서 동질감으로 변화한다. 둘 사이에는 언어도 국적도 다르지만, ‘여성’이라는 공통된 조건이 있다. 마사코는 점차 박경원을 향한 적대심을 내려놓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로 성장한다. 마사코의 존재는 박경원이 외롭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리고 동시에, 시대와 성별의 이중 굴레를 버티는 또 하나의 ‘비행하는 여성’이다.

이정희 : 박경원과는 또 다른 여성 비행사다. 단순히 경쟁자라고 하기보다, 박경원이라는 인물의 욕망과 비행에 대한 열정을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다. 박경원이 좀 더 개인의 꿈과 비행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조종사로서의 명예를 쫓는다면, 이정희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성으로서 비행을 통해 사회적 역할을 하거나, 민족적 대의 같은 좀 더 현실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도쿠다 교관 (Tokuda Instructor) : 도쿠다는 일본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엄격하고 권위적인 군인 출신의 인물이다. 그는 규율과 복종을 중시하는 인물로, 학생들에게 감정적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 특히 조선인 여성인 박경원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편견과 냉소를 드러낸다.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며, 비행은 일본 남성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도쿠다는 박경원에게 체제와 질서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의 지시는 날카롭고, 그의 판단은 자비가 없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실력 앞에서는 솔직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경원이 비행 능력과 집중력으로 자신의 기준을 넘어서는 모습을 보이자, 점차 그녀를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그의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박경원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이는 곧 박경원이 단지 한 명의 조선인 여성이 아니라, 진짜 조종사로 인정받았음을 상징한다. 도쿠다는 직접적으로 박경원의 조력자가 되지는 않지만, 그녀가 진정한 파일럿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가장 혹독한 스승이 된다.

 

감독

윤종찬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처음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진 않았다. 젊은 시절엔 글을 쓰고, 세상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현실은 그를 스크린 앞으로 데려갔다. 단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진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렌즈를 통해 인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장편영화는 《소름》(2001)이었다. 공포 장르였지만, 심리적 밀도가 깊었다. 그는 장르를 빌려 인간의 내면을 해부했다. 그 영화는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단순한 장르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왜 두려워하는가. 시대는 왜 인간을 밀어내는가. 그런 질문은 《청연》으로 이어졌다.

《청연》은 그가 직접 발굴한 인물이 아니다. 박경원이라는 존재는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윤종찬은 한 기사를 통해 그녀를 처음 알게 됐다. 이름 석 자에 얽힌 오해가 많았다. 친일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박경원이 진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됐다.

그는 시대를 꺼냈고, 인물을 다시 세웠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후원도, 여론도 냉담했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고, 왜곡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는 계속 촬영을 강행했다. 청연은 단순한 전기 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 식민지, 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누군가의 죄를 덮으려 하지 않았다. 단지, 판단을 유예하고 싶었다.

감독 윤종찬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견디게 만드는 사람이다. 그의 영화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진실은 묵직하다. 그는 박경원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으로 그린다. 선택과 침묵, 열망과 오해를 함께 그린다. 그의 렌즈는 단죄보다 질문에 가깝다. 그래서 《청연》은 논란이 되었지만, 동시에 기억되었다.

 

배우

장진영 : 강단 있는 연기로 시대를 살아낸 여성의 얼굴을 만들었다. 그는 멜로, 스릴러, 드라마를 오가며 감정의 결을 정교하게 다룰 줄 아는 배우였다. 《소름》에서 보인 깊은 내면 연기는 단순한 장르 영화에서 인간의 고통을 끌어냈다. 《청연》에서는 그 능력이 정점에 달했다.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한 인물의 생을 함께 겪은 듯했다. 고요하지만 단단했고, 고통스럽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장진영의 박경원은 고증된 역사보다 더 설득력 있는 진실이었다. 그의 연기는 기록을 넘어 한 사람의 영혼을 꺼내 보여줬다.

김주혁 : 감정을 과장하지 않지만, 언제나 진심이 있는 배우였다. 그는 《싱글즈》에서 로맨틱한 남자를,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는 내면의 허약함을 보여줬다. 《청연》에서 그는 침묵 속에서도 서사를 만들었다. 연기는 말보다 시선으로 가야 한다는 걸 보여줬다. 한지혁이라는 인물은 시대를 향한 타협과 인간적인 아픔을 동시에 지녔다. 김주혁은 그 균열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는 인물의 고뇌를 대사 없이도 증명할 수 있는 배우였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건 그가 더 많은 진실을 연기로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민 :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일본인 배우로, 이중 문화 속에서 감정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 《청연》에서 그가 연기한 기베 마사코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었다. 그는 박경원의 거울이자 적이며, 동시에 동질성을 가진 존재였다. 유민은 강한 눈빛과 절제된 말투로 캐릭터의 권위와 열등감을 동시에 보여줬다. 질투와 존경, 경계와 연대가 동시에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잘 조율했다. 그 연기는 날카롭고 조용했다. 유민은 단순한 반대자가 아닌, 시대 속 또 다른 ‘여성’의 얼굴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한지민 : 섬세하고 조용한 감정을 끌어올리는 데 능한 배우다. 《올인》에서의 단아한 이미지부터, 《미쓰백》에서의 강인함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청연》에서는 시대에 남겨진 여성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줬다. 이정희는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지만, 쉽게 순응하지도 않는다. 한지민은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충분한 서사를 만들었다. 작은 몸짓과 눈빛 하나로 캐릭터의 내면을 전달했다. 그 연기는 차분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경원의 하늘을 부러워하면서도 끝내 현실에 남아 있는 인물을 정확히 표현했다.

나카무라 토오루(Nakamura Toru) :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 베테랑 배우다. 《청연》에서 그는 일본 비행학교 교관 도쿠다 역을 맡아 날카로운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연기는 차갑고 단단했지만, 결코 일차원적이지 않았다. 도쿠다는 악인이 아니라 시대를 대변하는 구조물이었다. 나카무라는 그런 인물을 연기로 설득시켰다. 무표정한 얼굴과 냉정한 언행 속에도 미묘한 존중과 갈등이 있었다. 그는 억압하는 권위와 인간적인 인정을 동시에 담아낸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존재는 박경원의 성장을 가로막는 벽이자, 그 벽을 넘게 만드는 힘이었다.

 

평가

《청연》은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실존 인물 박경원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둘로 나뉘었다. 한쪽은 그녀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기억했고, 다른 한쪽은 친일 행적에 주목했다. 영화는 그 중간을 걸었다. 판단보다 질문을 택했다. 평론가들의 반응도 복잡했다.

일부는 장진영의 연기를 극찬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견디는 연기였기 때문이다. 평론가 이동진은 장진영이 만든 박경원이 역사의 공백을 채웠다고 말했다. 연출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영상미는 섬세했고 미술과 의상은 완성도가 높았다. 하지만 플롯 전개가 단조롭다는 지적도 있었다. 윤종찬 감독의 연출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감정의 흐름이 거칠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묵직한 질문을 남겼다.

작품성은 시일이 많이 지난 후 인정받았기는 했지만 박경원의 드러난 친일행적과 홍보활동 실패로 흥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시대를 꺼내는 작업이 늘 대중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순히 박경원을 재현하지 않았다. 그녀를 통해 한 시대를 되묻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평론가들은 영화의 용기에 주목했다. 특정한 입장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선택이었다. 《청연》은 누군가를 미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낙인찍지도 않았다. 이 균형이야말로 윤종찬 감독의 연출이 만든 가장 큰 성취였다.

 

리뷰 후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든 작품에 대한 생각

《청연》은 불편하다. 박경원이 날아올랐다는 사실보다, 그게 왜 지금까지 금기였는지가 더 불편하다. 우리는 아직도 ‘누구 편인가’부터 묻는다. 선택의 이유보다, 선택의 소속을 따진다. 꿈이 친일이면 꿈도 삭제해버리는 사회다. 실존은 본질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했던 말, 여기선 통하지 않는다.

장진영이 연기한 박경원은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비행한다. 사는 것도 날아오르는 것도 스스로 결정한다.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인다. 공동체가 통제할 수 없는 개인은 언제나 두렵다. 그녀는 도망친 게 아니다. 고작 날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비행에 낙인을 찍었다.

영화는 그 낙인을 정당화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관객이 선택하게 만든다. 그게 더 불편하다. 왜냐면, 이 사회는 선택을 개인에게 맡기는 법을 잊은 지 오래니까. ‘애국이냐 아니냐’ 같은 이분법으로는 박경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유효한 문제다. 연대를 말하면서도 다름을 못 견디는 나라에서, 《청연》은 실존주의자처럼 물어본다. "너는 너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냐"고.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