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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지원금 없는 택배 노동자가 자본에게 당하는 소외 《미안해요, 리키》

영화를 좋아하세요? 2025. 7. 1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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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2019)
《미안해요, 리키》(Sorry We Missed You, 2019)

 


들어가는 말

리키는 장기적인 실업 상태를 끝내기 위해 택배 기사로 계약한다. 명목상 그는 ‘자영업자’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자유와 주체성의 이름 아래 철저히 계산된 통제였다. 배송 지연, 기름값, 휴식 시간조차 모두 그가 책임져야 하고, 회사는 그를 직원으로도, 인간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고용이 아닌 계약이라는 말로 노동자의 보호 장치는 제거되고, 리키는 자신이 고른 줄 알았던 길에서 천천히 옭아매인다.

아내 애비는 요양보호사로 하루 종일 타인의 돌봄에 시간을 바친다. 아이들은 부모의 부재 속에서 방치되고, 특히 아들 세브는 학교조차 거부하며 분노를 내면화한다. 가족은 한 지붕 아래 있지만, 시간 속에서는 점점 멀어져 간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만, 현실은 그 의지를 무너뜨리는 구조를 이미 완성해 놓았다.

리키가 몸을 던질수록 생계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모호해진다. 자본은 감정도, 희망도 계산하지 않으며, 그의 헌신은 숫자로 환산될 뿐이다. 영화는 이 노동의 모순이 한 개인의 실패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 폭력임을 정확히 보여준다.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줄 알지만, 실은 외부 조건에 의해 운명처럼 굴러간다.

켄 로치는 리키 가족을 통해 노동자 계층이 자본의 톱니바퀴 속에서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고통스럽게 묘사한다.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반복되는 일상, 침묵 속의 갈등, 그리고 무너지는 관계. 이는 단지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의 얼굴이자, 셰익스피어적 아이러니가 현대적 형태로 재현된 비극이다.

 

줄거리

리키는 한때 건설업에 종사하던 가장이었다. 금융 위기로 일자리를 잃은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택배 기사가 되는 길을 택한다. 겉으로는 ‘자영업자’라는 말이 붙지만, 실상은 철저한 시간 통제와 계약 위반 시 벌금으로 구조화된 일방적 노동이다. 그는 주어진 GPS와 바코드를 따라 움직이며, 인간이 아닌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한다.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제기한 ‘개인의 자아 실현과 사회 질서 사이의 간극’은 여기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리키의 아내 애비는 요양보호사로, 시간당 급여를 받으며 노인을 돌본다. 그녀 역시 일터에서 감정을 소진한 채 돌아오고, 두 아이는 점점 부모와의 거리감을 느낀다.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세브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리 낙서와 무단결석으로 자신의 좌절을 표현한다. 이 가족은 함께 있지만 각자의 현실에 고립되어 있다. 괴테가 그려낸 ‘가정의 이상적 조화’는 이 시대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몽상으로 변질된다.

배송 사고, 고객 항의, 차량 파손 등은 리키의 하루를 짓누른다. 어떤 날은 소변을 참으며, 어떤 날은 식사도 거른 채 박스를 나른다. 그러다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차를 계속 몰고 나간다. 책임감이라는 이름 아래 그는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주인공처럼, 그는 의지를 가졌지만 그 의지를 실현할 수 없는 조건 속에 있다. 선택이 있어 보이지만 실은 선택지조차 허상이다.

영화 후반, 리키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배송을 강행하고, 결국 쓰러진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 인간은 여기서 감정이나 관계가 아닌, ‘배송 실패’의 기록으로만 남는다. 괴테가 탐구한 인간 존재의 내면성과 고귀함은, 이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리키의 비극은 단지 개인의 한계가 아니라, 가족과 노동, 인간성과 시스템 사이에서 벌어지는 근본적 단절의 상징이다.

 

등장인물

리키 터너 (Ricky Turner)
리키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지만, 택배 기사라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그는 자유를 얻기 위해 자영업 계약을 선택하지만, 그 선택은 곧 통제된 의무로 되돌아온다. 셸링의 철학에서 말하는 '자유의지의 역설' 속에 그는 갇힌다. 외적으로는 능동적인 노동자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점점 분열되어가는 자아를 지닌 존재다. 그는 살아 있는 정신이지만, 구조의 논리는 그를 생기 없는 기계로 환원시킨다.

애비 터너 (Abby Turner)
애비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타인의 삶을 돌보는 동시에, 자신과 가족의 삶을 희생한다. 그녀는 외부적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점점 고갈되어간다. 셸링이 말하는 '자연과 정신의 긴장'이 그녀의 존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애비는 타인을 위한 존재가 되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지워낸다. 그녀는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지만, 결국 감정적 붕괴를 피하지 못한다. 현실은 그녀의 선의를 소진시킨다.

세브 터너 (Seb Turner)
세브는 청소년기로 접어든 아들로, 부모의 부재와 사회 구조의 압박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학교를 거부하고 거리 예술에 몰두하는 그는 제도화된 틀을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셸링의 관점에서 그는 자유로운 ‘자연적 의식’이며, 아직 사회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순수한 정신이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가족 해체의 과정에서 점점 무기력해진다. 세브는 저항의 몸짓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것이 허공에 머물 뿐임을 깨닫는다.

리사 제인 터너 (Liza Jane Turner)
리사는 가족 중 가장 어리고 순수한 딸이다. 그녀는 현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침묵 속에서 모든 긴장을 감지한다. 셸링의 ‘무의식적 자연의 힘’은 그녀의 눈빛과 말없는 행동에 나타난다. 그녀는 아직 분열되지 않은 세계 속에 있으나, 동시에 분열의 현장을 목격하는 존재다. 감정에 솔직한 그녀의 모습은 가족 전체의 붕괴를 정직하게 비추는 거울이며, 영화 속에서 가장 순도 높은 감정의 통로다.

맬키 (Malkey – 배송 관리자)
맬키는 리키가 소속된 물류 회사의 관리자이며, 규율과 효율을 앞세운 체계의 화신이다. 그는 감정 없는 언어로 책임을 전가하며, 인간을 숫자와 계약으로 환산한다. 셸링의 사유에서 그는 자연을 완전히 억압한 형식의 결정체이며, 자유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을 억압하는 비인간적 질서다. 그는 악의적이지 않지만, 오히려 그 무감각함이 더욱 위협적이다. 맬키는 체제의 도구이자, 인간이 사라진 조직의 상징이다.

감독

켄 로치는 1936년 영국 워릭셔에서 태어났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연극과 텔레비전 연출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픽션을 넘어선 현실에 관심을 돌렸고,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 계층의 삶을 꾸준히 조명해왔다. 그의 영화 세계는 칸트가 말한 ‘도덕 법칙’과 ‘실천 이성’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부정당하는지를 포착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 《Kes》(1969), 《My Name is Joe》(1998), 《Sweet Sixteen》(2002),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등은 모두 체계와 제도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존엄을 탐구했다. 특히 그는 관찰자적 거리보다 참여자적 태도를 견지했고, 비전문 배우를 활용한 자연주의적 연출로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칸트가 강조한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명제는 로치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관통하는 윤리적 중심축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현대 자본주의 노동 구조가 어떻게 인간을 효율성의 도구로 전락시키는지를 탐사하는 작품이다. 로치는 이 영화를 통해 ‘자영업자’라는 명목 아래 실제로는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했다. 그는 수많은 현장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시나리오를 구체화했고, 인물들이 겪는 갈등과 고통을 일시적 문제가 아닌 구조적 윤리의 결여로 인식했다.

로치에게 있어 영화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 장이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그는 칸트적 관점에 입각해, 인간이 자신의 이성적 자유와 존엄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자본의 효율성은 공동선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이 제도 안에서 자기 목적성을 상실하는 순간 사회는 도덕적 위기를 맞이한다. 로치의 카메라는 그 위기를 기록하며, 동시에 관객에게 도덕적 각성을 촉구한다.

 

배우

크리스 히친 (Kris Hitchen) :
크리스 히친은 리키 터너 역을 통해 현대 노동자의 초상을 체현한다. 그는 자율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구조에 의해 결정된 단자(monad)다. 그의 연기는 피로와 책임, 절망을 정교하게 누적시킨다. 라이프니츠가 말한 조화의 세계는 이 인물을 피해 간다. 그는 세계 속에서 고유한 개체지만, 그 고유성이 시스템에 의해 압도당한다.

데비 허니우드 (Debbie Honeywood) :
데비 허니우드는 애비 역으로 등장해, 감정과 현실 사이에서 분열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자신을 지워가는 존재로,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말하는 독립적 단자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그녀의 연기는 감정적이되 과장되지 않고, 관객을 내면적 조화의 결핍으로 이끈다. 그녀는 현실 속 윤리의 파수꾼이다.

리스 스톤 (Rhys Stone) :
리스 스톤은 아들 세브 역할을 맡아,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청소년의 혼란과 저항을 정직하게 그려낸다. 그는 세계 안에서 스스로의 법칙을 따르는 또 다른 단자이며, 가족이라는 집합 안에서 그 조화를 거부한다. 그의 행동은 비이성적이지만, 감정적으로는 정당하다. 라이프니츠의 조화론에 반하는 이 파열음은, 오히려 그 이론의 인간적 한계를 드러낸다.

케이티 프록터 (Katie Proctor) :
케이티 프록터는 어린 딸 리사 제인 역을 맡아 가족 내 침묵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그녀는 아직 사회 구조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순수한 단자이자, 이 영화의 도덕적 감응을 일깨우는 중심축이다.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는 언어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인간 사이의 조화 가능성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있다.

로스 브루스터 (Ross Brewster) :
로스 브루스터는 냉정한 물류 관리자 맬키를 연기한다. 그는 시스템의 철학을 내면화한 존재로, 효율성과 질서의 구현체다. 라이프니츠가 상정한 조화 속의 단자처럼 그는 자기 세계에서 완결된 논리를 지닌다. 하지만 그 논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무시한다. 그의 연기는 인물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만들며, 체계적 폭력의 일면을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낸다.

 

평가

《미안해요, 리키》는 자본주의 체계에서 노동자가 어떻게 도구화되고, 가족이라는 근본 단위가 어떻게 균열되는지를 정확히 포착하며 전 세계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더 가디언은 이 작품을 “현대 영국 사회의 도덕적 양심”이라 명명했고, 로튼 토마토는 80% 이상의 신선도를 부여하며 “켄 로치의 가장 통렬한 경고”라고 평했다.

헤겔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주체의 자기실현’이 제도 안에서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노동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을 외화하는 과정이어야 하나, 리키의 노동은 오히려 인간성의 상실을 재생산한다. 가족의 해체는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시대정신(Zeitgeist)이 초래한 역사적 필연으로 읽힌다. 주체는 자본이라는 절대정신의 외피 아래 그 의지를 상실하고, 제도는 도덕적 의식을 실현하는 장이 아니라 그것을 억압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이 작품은 2019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고, 스위스 루카르노 영화제에서는 유럽 영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또한 영국 인디펜던트 영화상(BIFA)에서 최우수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 평론가 협회상에서는 사회적 공헌에 주목하는 영화로 선정되었다. 이는 단지 예술적 성취가 아니라, 도덕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의 힘에 대한 사회적 응답이다.

 

리뷰 후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든 작품에 대한 생각

리키는 자유롭게 일하겠다고 계약서를 쓴다. 계약서에는 희망이 아니라 벌금과 책임이 적혀 있다. 그는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은 선택된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고, 그 대가는 고통이다. 리키는 매일 아침 유니폼을 입고 절망을 배송한다. 택배 상자에는 상품이 아니라 노동자의 분해된 자아가 담긴다.

자유는 없다. 책임만 있다. 애비는 늙은이들의 욕창을 닦으며 인간 존엄의 환상을 지우고, 아들 세브는 낙서로 사회를 거부한다. 이들은 아무도 죽지 않지만, 확실히 살아 있지도 않다. 실존이란 부르주아가 소비하는 허울 좋은 개념일 뿐, 현실에선 보험 없는 노동자들이 그 뜻을 실천 중이다. 웃기지 않는가.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분배되지 않은 재화다.

이 영화는 시니컬하지 않다. 다만 진실하다. 우리가 사는 이 체계는 리키가 넘어지면 일어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안다. 사르트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다. 시스템은 지옥이다.’ 그리고 그 안에 던져진 인간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를 행사할 시간도 에너지도, 심지어 자각조차 없다. 리키는 존재한다. 하지만 의미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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