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빈곤, 불평등, 인종 차별, 삶에 대한 고찰
들어가는 말
오스카 그랜트는 스물두 살의 젊은 흑인 남성이다. 과거에 마약 거래로 체포된 전력이 있었지만, 그는 다시 바르게 살기 위해 애쓴다. 새해를 하루 앞둔 그날, 그는 딸과 시간을 보내고 어머니의 생일을 준비하며 가족과 함께 소박한 하루를 보낸다. 그는 실직했지만 그 사실을 가족에게 숨긴 채, 재취업을 위해 전화하고 발품을 팔며 자신을 다시 세우려 한다. 그의 얼굴엔 지친 기색보다, 어떻게든 달라지려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연인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낯선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평범한 청년처럼 웃는다. 그는 누군가의 연인이자 아버지이고 아들이며 친구로 살아간다. 하지만 귀가하던 길, 프루트베일 역에서 상황은 갑자기 바뀐다. 경찰은 신고에 따라 오스카와 친구들을 역 플랫폼에 눕히고 제압한다. 오스카는 협조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한 경찰이 그의 등을 누르고 뒤에서 총을 발사한다.
그 총성은 새해가 시작되기 직전 울렸다. 오스카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결국 새벽녘 숨을 거둔다. 뉴스는 이를 다뤘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분노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분노보다 앞서, 오스카라는 한 사람의 하루를 보여준다. 그의 삶은 비극의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품고 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사회가 쉽게 잊어버리는 얼굴에 이름을 붙이고, 숫자로 남겨진 죽음 뒤에 감춰진 사람의 존엄을 조용히 꺼내 보인다.
줄거리
오스카 그랜트는 스물두 살의 젊은 흑인 남성이다. 어린 나이에 마약 거래로 체포된 이력은 그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감과,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다짐 사이에서 갈등한다. 새해를 하루 앞둔 어느 아침, 오스카는 다시 시작해보려는 마음으로 눈을 뜬다. 그는 직장을 잃었지만 가족에게는 숨긴 채, 딸을 챙기고 어머니의 생일을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생활은 팍팍하지만 가족의 웃음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고 싶어 하고, 한 사람의 아버지, 아들, 연인으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사회는 여전히 전과자라는 낙인을 그에게 쉽게 떼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오스카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친절을 베풀며 하루하루를 견뎌간다.
그날 저녁, 그는 친구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새해 전야의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그는 연인과 함께 웃고, 과거의 충동을 억누르며 조용히 하루를 보내려 한다. 그가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그저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다. 그는 싸움을 피하려 하고, 낯선 이와도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그 작은 선택들 속에는 변화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더 이상 문제아가 아니고 싶었고,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그는 삶을 선택했고, 책임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귀가하던 길, 프루트베일 역에서 상황은 급변한다. 오스카와 그의 친구들은 경찰의 제지를 받는다. 경찰은 이들을 승강장에 눕히고, 과도한 제압을 시도한다. 오스카는 등을 보인 채 엎드려 있었고, 특별히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 중 한 명은 그의 등을 누르고 있다가 갑자기 권총을 꺼내 발사한다. 총성은 단 하나였지만, 그 울림은 크고 깊었다.
오스카는 심각한 출혈을 입은 채 병원으로 이송된다. 가족은 병원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지만, 새해가 밝기 전 그는 결국 숨을 거둔다. 새해의 시작과 동시에 그의 생은 끝났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로 보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었다. 지역 사회는 분노했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그를 기억하려 했다. 영화는 이런 분노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그 하루를 조용히 따라간다. 오스카가 숨 쉬고, 웃고, 누군가를 배려하던 모습은 그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숫자가 아니었고, 뉴스 헤드라인의 소재도 아니었다. 그는 사랑을 주고받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존재였다. 영화는 그의 하루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구조적 불평등을 꺼내 보인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오스카의 죽음보다, 그의 삶에 더 집중한다. 어떻게 살아갔고, 무엇을 바랐으며, 왜 그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허무했는지를 묻는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단 하루, 단 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과 빈곤, 제도적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인지를 담고 있다. 오스카는 이상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실수했고, 방황했고,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그는 더욱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인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왜 죽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더 무게를 두며, 관객에게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를 단지 희생자로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의 삶으로 기억할 것인가.
등장인물
오스카 그랜트는 과거의 잘못을 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평범한 청년이다. 그는 직장을 잃었고, 가족을 책임져야 하며, 과거 전과자라는 사회적 낙인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연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려 한다. 타티아나를 사랑스럽게 안아 올리는 손길에는 생의 진심이 담겨 있고, 어머니와 나누는 대화 속에는 죄책감과 용서가 교차한다. 세상은 그를 쉽게 판단하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을 바꾸려 애쓴다. 작은 일에도 배려하고, 지하철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그의 모습은 그의 본심을 말없이 증명한다. 그의 하루는 특별하지 않았지만, 그가 품은 진심은 많은 이들의 평범한 삶에 깊이 공명한다.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그의 삶은 정지되었지만, 남은 자들에게 그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소피나는 오스카의 연인이자 한 아이의 엄마다. 그녀는 감정적이면서도 현실에 강한 여성이다. 오스카의 불안정한 행동에 분노하면서도, 그의 진심을 믿고 함께 미래를 꿈꾼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아이를 돌보며, 매일의 피로를 이겨낸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동반자로서 삶을 꿋꿋하게 감당한다. 오스카가 직장을 잃었다는 사실에 실망하면서도, 그를 단호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말없이 눈을 피하거나, 짧은 말투로 감정을 눌러 담는 장면들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품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오스카를 품지만, 동시에 현실이라는 무게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소피나는 오스카와의 관계 속에서 완전히 기대지 않으며, 스스로의 삶을 지켜내는 독립적이고 단단한 여성이다.
완다는 오스카의 어머니로서, 단순한 보호자가 아닌 방향을 제시해주는 존재다. 그녀는 오스카가 감옥에 있을 때도,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늘 똑같은 마음으로 그를 맞는다. 냉정해 보일 만큼 단호하게 그를 타이르기도 하지만, 그 속엔 꺾이지 않는 사랑이 흐른다. 교도소 면회 장면에서 보여준 그녀의 말투는 모든 어머니가 자식에게 바라는 마지막 희망의 말이다. 그는 다시는 감옥에 가지 않길 바라고, 자신이 겪어온 고생이 자식에겐 닿지 않기를 기도한다. 오스카가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완다는 늘 곁에 있었고, 그가 바르게 살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가족을 이끄는 중심이자, 동시에 세상의 차가움과 맞서 싸우는 마음의 방패다. 비극이 닥쳤을 때, 그녀의 울음은 개인의 슬픔을 넘어 사회 전체의 통곡처럼 들린다.
타티아나는 아직 말이 서툰 어린아이지만, 그녀의 존재는 이야기에 큰 무게를 더한다. 오스카는 타티아나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타티아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만, 때론 무심한 모습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손짓, 아빠를 찾는 목소리는 오스카의 마음을 흔들고, 그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그녀는 그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이고, 세상의 복잡한 일들을 모른 채 자라난다. 그러나 그런 순수함이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성이다. 오스카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은 직장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었다. 바로 타티아나였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안 하겠다고 다짐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타티아나는 아버지에게 내일을 향한 약속이자, 자신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의 증거였다.
채드는 프루트베일 역에서 오스카를 무력으로 제압한 경찰 중 한 명이다. 그의 등장 시간은 짧지만, 그의 존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적 폭력의 상징이다. 채드는 흑인 남성을 향한 사회적 시선과 편견을 몸에 익힌 인물로, 규칙을 따른다는 명분 아래 인간성을 무시한다. 그는 총을 쏘는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오스카가 무력한 상태였음에도, 그는 상황을 제어하지 못했고, 결국 총격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를 단순한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제도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며, 편견에 익숙한 사회의 산물이다. 그가 가진 권력은 개인의 것이 아닌 체제의 연장이며, 그가 행한 폭력은 개인의 분노가 아닌 구조의 무책임이었다. 영화는 채드를 악마화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복잡함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감독
라이언 쿠글러는 198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그가 자란 도시 오클랜드는 흑인 커뮤니티가 밀집한 곳으로, 인종 간 긴장과 빈곤, 폭력의 문제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아버지는 보호관찰관, 어머니는 지역 내 사회복지사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커뮤니티의 현실을 가까이에서 보았고, 그것은 그의 세계관을 결정지었다. 처음엔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지만, 글쓰기 과제를 통해 이야기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에선 생리학을 전공했지만, 인물의 감정과 삶을 다루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느꼈고, 결국 남캘리포니아대학(USC) 영화예술학교로 진로를 바꿨다.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영화를 통해 '소외된 목소리를 듣게 만들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는 단편영화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시선을 갈고닦았다. 쿠글러는 데뷔 전부터 흑인 사회 내 인물들의 심리와 정체성을 주제로 한 단편을 지속적으로 만들었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스토리보다 인물의 내면과 현실을 따라가는 섬세한 시선으로 평가받았다. 단순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이 마주한 선택의 순간과 사회 구조 속의 모순을 함께 그려냈다. 그는 현장의 리얼함을 중시했고, 배우들의 감정 표현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며 삶 자체를 담으려 했다. 오클랜드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숨소리를 영화로 옮겨오려는 시도는 그의 초기 작업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쿠글러는 현실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회복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그의 첫 장편 데뷔작으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009년 1월 1일, 오스카 그랜트라는 청년이 프루트베일 지하철역에서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은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쿠글러는 사건 당시 22세였고, 오스카와 비슷한 나이 또래였기에 더욱 깊은 감정적 연결을 느꼈다. 그는 오스카의 삶이 단지 희생자라는 타이틀로만 기억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하루 동안의 오스카를 따라가며, 사람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조명하기로 결심했다. 감독은 비극 이전의 일상에 초점을 맞췄다. 딸과 나누는 대화, 어머니와의 갈등,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쿠글러는 그를 하나의 인간으로, 아들로, 친구로, 아버지로 보여주고자 했다.
쿠글러는 이 영화를 통해 제도적 폭력과 인종차별을 말없이 고발한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보다,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구조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는 인종차별을 거칠게 외치는 대신,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감으로써 관객 스스로 질문을 품게 만든다. 영화는 누구도 악마화하지 않는다. 경찰도, 피해자도, 군중도 모두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런 정직한 태도는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준다. 쿠글러는 자신이 살아온 오클랜드의 공기, 거리의 감정, 사람들의 표정을 영화 속에 녹여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작은 예산과 무명의 배우들만으로도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그의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쿠글러의 시작은 그 어떤 거대한 메시지보다 더 진실했고 깊었다.
배우
마이클 B. 조던 : 오스카 그랜트 역으로 출연한 그는 삶의 위태로움과 희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인물의 내면을 강렬하게 구현해낸다. 감정을 억누르되 억압하지 않고, 격한 상황에서도 결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일상적인 대사 하나에도 진정성을 담아냈고,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도 삶을 바꾸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인물의 심리를 정직하게 드러냈다. 오스카의 고통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낳은 비극이라는 점을 연기로 입증해냈다. 마이클 B. 조던은 이 역할을 통해 스타로 부상했지만, 그는 그 이전에 인간 오스카로서 관객 앞에 먼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보다 슬픔을 먼저 말하며, 폭력보다 인간적인 후회를 먼저 담았다. 그 절제된 연기가 이 영화의 무게를 지탱하는 중심이 된다.
멜라니 디아즈 : 소피나 역을 맡아 극 중 오스카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그녀는 이 인물을 단순한 조력자로 만들지 않는다. 복잡한 감정과 책임, 그리고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을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의심과 신뢰 사이에서 흔들리며, 오스카에게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보호하려 한다. 감정의 진폭이 큰 장면에서도 그녀는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된 표정과 시선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대사보다 행동과 침묵으로 더 많은 것을 표현해내는 연기 방식은 극 전체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요소가 된다. 소피나는 사랑만으로 오스카를 붙잡는 인물이 아니라,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 동반자다. 멜라니 디아즈는 이 인물을 통해 한 여성의 복잡한 내면과 일상 속의 투쟁을 정직하게 비춘다.
옥타비아 스펜서 : 완다 역을 맡은 그녀는 오스카의 어머니로서 영화의 도덕적 중심을 형성한다. 자식을 바르게 키우려는 단호함과, 세상이 자식을 해칠까 두려워하는 불안함을 동시에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의 연기는 억지 눈물이 아니라 삶 속에서 굳어져버린 침묵으로 깊이를 더한다. 교도소 면회 장면에서 단호하게 등을 돌리는 장면은 자식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절박함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극대화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과 눈빛에는 부모로서의 통찰과 무게가 담겨 있다. 옥타비아 스펜서는 이 역할을 통해 어머니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분노, 책임, 희생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리야나 닐 : 타티아나 역으로 출연한 그녀는 짧은 장면에도 불구하고 극 전체의 정서적 뿌리를 형성한다. 아역 배우로서 감정을 조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만들며, 오스카와의 교감을 통해 그의 삶에 의미를 더한다. 그녀는 대사가 많지 않지만, 아버지를 향한 시선과 무심한 말 한마디, 기대고 싶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영화의 핵심 감정을 증폭시킨다. 타티아나는 단지 오스카의 딸이 아니라, 오스카가 자신을 바꾸고자 했던 이유이자 그가 붙잡고 싶었던 미래의 상징이다. 아리야나 닐은 계산되지 않은 표정과 시선으로 진정성을 구현하며, 그녀의 존재는 오스카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성숙함을 강요하지 않고도 관객의 마음을 건드리는 감정 연기를 선보였다.
채드 마이클 머레이 : 그는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경찰 역할을 통해 체제의 냉담함을 구현해낸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과잉된 감정도, 극적인 대사도 없다. 오히려 무표정한 태도와 무관심한 말투로, 어떤 구조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어떻게 타인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그는 오스카를 위협하는 악당처럼 등장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인 공포를 전한다. 채드 마이클 머레이는 그 역할을 통해, 사회적 폭력이 어떻게 익명성을 띠고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지를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는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지만, 그의 행동은 체제의 결과로 해석된다. 그 침묵은 일부러 연출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많은 이들이 그런 침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평가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지만,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서사 영화로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럼에도 감정적 연출을 자제하고, 인물의 삶을 있는 그대로 따라가는 방식이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많은 비평가들이 “선동하지 않는 분노”, “절제된 연민”이라는 표현으로 이 작품을 평가했다. 《뉴욕 타임즈》,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더 애틀랜틱》 같은 주요 언론도 작품성과 사회적 의제를 함께 끌어낸 감독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영화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94%의 신선도 지수를 기록했으며, 메타크리틱에서도 85점을 받아 평단의 고른 지지를 얻었다. 이는 단지 소재의 민감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방식의 성숙함에 대한 인정이었다.
평단은 감독 라이언 쿠글러의 연출력에 특히 주목했다. 첫 장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연출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인물의 동선을 좇는 촬영 방식,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표정과 침묵을 활용한 연출, 그리고 편집의 흐름 모두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어느 누구도 악역으로 몰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면죄부를 주지 않았다. 이는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감정적 편향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마이클 B. 조던과 옥타비아 스펜서의 연기도 언급이 많았다. 조던은 오스카를 하나의 상징이 아닌 인간으로 그려냈으며, 스펜서는 어머니 역할을 통해 사회 전체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연출, 연기, 주제의 균형’을 모두 갖춘 데뷔작으로 평가되었다.
이 영화는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모두 수상했다. 두 상을 동시에 받은 작품은 흔치 않으며, 이는 평단과 관객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후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고, 시카고, 고담,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도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거나 후보에 올랐다.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에서는 첫 장편 데뷔작으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저예산 독립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영화제에서 작품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인정받은 점은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수상 자체보다 의미 있는 건 이 영화가 사회 구조 안의 침묵된 진실을 꺼내려 했다는 점이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상업적 흥행보다 ‘기억되는 영화’로 자리 잡았다. 미국 내 박스오피스 성적은 제한 개봉에도 불구하고 1,700만 달러를 기록했고, 이는 제작비의 15배 이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과는 숫자가 아니라, 관객과 평론가가 동시에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한다는 점이다. 그 해 미국 영화 연구소(AFI)는 이 영화를 ‘올해의 10대 영화’ 중 하나로 선정했고, 여러 대학과 시민단체, 인권단체가 이 영화를 공동체 상영용 자료로 사용했다. 작품은 단지 비극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고,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데 집중했다. 이 질문은 이후 쿠글러의 후속작들—《크리드》, 《블랙 팬서》—에도 이어졌으며, 그는 단 한 편의 독립영화로도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 되었다.
리뷰 후 실존주의 철학이 스며든 작품에 대한 생각
오스카는 매일 아침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영화는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의 하루는 특별하지 않았다. 퇴근하고, 전화받고, 싸우고, 아이를 안고, 웃다가 다시 욕설을 듣는다.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문제는 그가 누구였느냐가 아니다. 그가 그날 경찰에게 죽었다는 것, 그게 다다. 그는 그저 흑인이었고, 실업자였고, 전과자였다. 아무리 딸을 사랑해도, 어머니를 걱정해도, 그 서술은 그의 이력에 포함되지 않았다. 타인이 정의한 존재가 곧 그의 운명이었다. 오스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의 자유는 제도의 잣대 앞에서 무의미해졌고, 책임은 오직 그 혼자만의 몫이었다.
자유는 좋지만, 책임은 불공평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기 때문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오스카는 변하려 했다. 약을 끊고, 일자리를 찾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세계는 그의 노력을 비웃듯 무시했다. 경찰은 변명조차 듣지 않았고, 사회는 회복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결정된 결말 앞에서 발버둥치는 일, 그게 삶이라고 하면 너무 끔찍하다. 영화는 오스카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그저 한 인간으로 등장하고, 그렇게 사라진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영화는 끝까지 견디며 보여준다.
영화는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슬퍼하라는 말도, 분노하라는 말도 없다. 오히려 그 감정이 일어나는 과정을 지켜보게 만든다. 감동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무력함에서 흘러나온다. 관객은 오스카의 삶을 따라가며 점점 이해하게 되지만, 그 어떤 장면도 친절하지 않다. 카메라는 설명하지 않고, 인물은 설득하지 않는다. 삶은 원래 불친절하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고, 본질은 타인의 언어로 규정된다. 오스카의 존재는 사건 이후에야 사회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그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실재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실재는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삭제되었다. 사람 하나를 지우는 데는 단 한 번의 오해면 충분하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는 존재가 부정되는 과정을 기록한 영화다. 그 어떤 철학책보다 묵직하고, 그 어떤 뉴스보다 구체적이다. 사건은 반복된다. 그래서 영화는 경고가 아니라 보고에 가깝다. 인간이 무력하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 상징이나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다. 삶 자체가 그 증거다.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 말없이 터지는 분노, 허탈한 웃음, 이런 것들이 이 영화의 서사다. 관객은 오스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기준으로 인간을 걸러내는지 보게 된다. 실존은 위대하지 않다. 오히려 초라하고 고립되어 있다. 영화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 사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다음 오스카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