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이 시대에 우리가 마주하는 교육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학교라는 곳은 한때 희망의 등불이었으나 지금은 좌절과 무기력이 만연한 장소가 되었다. 학생들은 방황하고, 그들을 가르쳐야 할 교사들은 열정을 잃어가는 슬픈 풍경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교육 현장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함께 나아가야 할 교육이 오히려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젊은 영혼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며, 어른들은 그들에게 손 내밀기를 주저하는 세상이다. 《디태치먼트》는 우리 사회가 짊어진 무관심의 무게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관계는 단절되고, 개개인은 고독하게 버려지는 실상을 조명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영화적 상상력을 ..
들어가는 말《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 1973)은 제임스 브리지스 감독이 하버드 로스쿨의 권위적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이다. 주인공 하트는 신입생으로서 학문적 열정에 가득 차지만 곧 킹스필드 교수의 수업 방식에 압도된다. 킹스필드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차용했으나 본래 의미를 왜곡했다. 그는 진리를 함께 찾는 동행자가 아니라,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전사를 길러내는 훈련자였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사유가 아니라 교수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정답을 내놓는 기계가 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교육은 지식 탐구의 장이 아니라 권력 훈련의 무대가 된다. 학생들은 인간적 개성과 감정을 지워버리고 오직 경쟁과 성적에 매달린다. 하트 역시 점차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잊어버릴 만..
들어가는 말《모나리자 스마일》(Mona Lisa Smile, 2003)은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웰즐리 여대는 명문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자유를 묶어 두는 울타리였다. 교수들은 지식을 전했으나 그 지식은 미래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결혼을 위한 장식품이었다. 학생들은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부엌과 아이 돌봄의 자리를 먼저 준비했다. 학문은 독립적 사고의 도구가 아니라 남성 사회를 받쳐주는 무대 장치였다. 이 속에서 캐서린 왓슨은 외부에서 온 바람이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결혼이 삶의 유일한 답이냐고 묻고,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의 태도는 교직원과 학부모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그러나 그 반발은 곧 기득권이 두려워하는 진실을 ..
들어가는 말《브릭》 은 학교를 지식의 터전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교실은 이미 권력과 거래의 무대다. 학생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이해관계자로 변한다. 약물과 범죄가 자연스럽게 섞인다. 교사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제도는 존재하지만 기능하지 않는다. 희망은 보이지 않고 규율은 무너진다. 브렌든은 이 무대에 홀로 서 있다. 그는 전 여자친구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진실을 찾겠다는 의지는 그의 무기다. 친구의 도움은 없고, 보호막도 없다. 오직 집요함이 그를 움직인다. 그는 고통을 짊어지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의 추적은 곧 제도의 균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라이언 존슨은 청소년의 언어를 누아르의 어둠으로 덮는다. 교복은 순수의 상징이 아니라 범죄의 가면이 된다. 조셉 고든 레빗은 집요한 탐정의 얼굴을 한다. ..
들어가는 말대통령은 재선을 앞두고 치명적인 성추문에 휘말린다. 그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해명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허구의 무대를 조성하려 한다. 정치 컨설턴트가 불려오고,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가 곧바로 동원된다. 전쟁이라는 가장 자극적인 서사가 선택되고, 거대한 연출이 차근차근 준비된다. 카메라 앞에서는 포성이 울리고, 애국적 노래가 방송 전파를 타고 흘러나간다. 스크린 속 여배우가 난민 소녀로 분장하고, 군복 입은 배우들이 영웅으로 떠받들어진다. 언론은 이 허구를 사실처럼 보도하며 정권의 필요에 맞는 장면들을 쏟아낸다. 국민은 눈앞의 화면을 의심하지 않고 진실이라 받아들인다. 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너지고, 진실은 조명 뒤로 사라진다. 이 영화가 풍자하..
들어가는 말폭스뉴스는 미국 보수 언론의 상징이자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매체다. 그 내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 로저 에일스는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다. 그는 뉴스 채널의 외양과 메시지를 통제했을 뿐 아니라, 여성 아나운서들의 경력을 미끼 삼아 권력을 남용했다. 언론의 책임은 뒤로 밀리고, 조직은 침묵을 선택했다. 정치권 역시 언론과 유착한 관계 속에서 그를 보호했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번번이 묻혔다. 그러나 몇몇 여성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가를 감수하고, 자신이 겪은 일을 세상에 알렸다. 이들의 용기는 조직 내부에 균열을 만들었다. 처음엔 각자의 자리에서 고립된 채 시작했지만, 점차 연대의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같은 조직 안에서도 위치에 따라 이해관계는 달랐지만, 그들이 공감한 건 침묵이 만든 고통..